자동화는 AX가 아니다
자동화가 생산비를 낮춘 뒤 진짜 AX는 시작된다. 정부혁신박람회 기업별 브로셔 제작 경험을 통해 업무 단위와 인간의 기획·검수 역할이 어떻게 바뀌는지 살펴본다.
100배 만들 수 있게 된 뒤, 무엇을 다르게 할 것인가
며칠 전 정부혁신박람회 기업별 브로셔 시안을 만들다가 잠시 멈칫했습니다. 예전에는 모든 기업에 돌릴 표준 자료 하나를 만드는 데에도 오래 걸렸습니다. 이번에는 콜드콜 대상마다 참여해야 할 이유를 달리 적은 버전을 만들어도 그때보다 빨랐습니다.
이 경험을 그저 ‘생산성이 좋아졌다’고 부르면 핵심을 놓칩니다.
자동화는 하던 일을 더 빠르고 싸게 만드는 일입니다. AX는 그다음에 시작됩니다. 비용과 시간이 급격히 줄었기 때문에 업무의 목적과 단위, 사람의 역할까지 다시 설계하는 일입니다.
최근 GPT-5.6 Luna의 가격을 보며 이 질문이 더 선명해졌습니다. OpenAI의 공식 안내에서 Luna는 100만 토큰당 입력 1달러, 출력 6달러인 GPT-5.6 계열의 최저가 모델입니다. 무료·Go 이용자에게는 Codex에서 같은 계열의 Terra 접근도 열렸습니다. 2026년 8월 9일 기준으로 Luna API 자체가 무료인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더 높은 수준의 지능이 저가 또는 무료 이용 구간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방향입니다.
이 흐름이 계속되면 보고서, 조사자료, 홍보물, 코드 같은 지식 산출물의 생산비는 더 낮아질 것입니다. 사람이 과거에 하나 만들던 시간에 AI가 수십 개를 만들고, 어떤 작업에서는 체감상 100배에 가까운 차이가 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100배와 100분의 1은 모든 업무에 적용되는 통계가 아닙니다. 생산비용 붕괴의 감각을 설명하기 위한 표현에 가깝습니다. 실제 연구에서 확인된 효과는 업무와 숙련도에 따라 훨씬 다릅니다. 고객상담사 5,179명을 분석한 NBER 연구에서는 생성형 AI 도구가 시간당 해결 건수를 평균 14% 높였지만, 초보·저숙련자는 34% 개선된 반면 숙련자에게 미친 영향은 작았습니다. AI가 누구에게나, 모든 일에서 같은 속도 향상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중요한 변화가 있습니다. 어떤 일의 비용이 임계점 아래로 내려가면, 단순히 같은 일을 더 많이 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전에는 비용이 맞지 않아 시도하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저는 정부혁신박람회를 준비하며 이 차이를 직접 경험했습니다.
한 장의 공통 브로셔에서 기업별 설득 논리로
과거에 행사 브로셔를 만든다면 대체로 하나의 표준 자료를 준비했습니다. 행사 개요, 일정, 장소, 참여 방법을 넣고 모든 기업에 같은 파일을 보냈습니다. 그것 하나를 만드는 데에도 기획, 원고, 디자인, 수정, 출력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들었습니다. 홈페이지도 대행업체가 결과물을 가져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먼저 박람회 아카이브 사이트의 PoC를 직접 만들었습니다. 기업 참여 안내 브로셔도 HTML과 PDF로 만들었습니다. 첫 버전을 만든 당일 QR과 시각 구성을 보완하고, 다시 기업 관점의 문장으로 고치는 작업까지 이어갔습니다. 예전 같으면 표준 브로셔 한 벌을 만드는 데 썼을 시간 안에서 여러 차례 개선이 가능해졌습니다.
더 큰 변화는 그다음에 있었습니다. 콜드콜 대상 기업을 조사하고, 기업마다 다른 참여 이유를 찾아 맞춤형 브로셔 시안을 만드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어떤 기업에는 공공서비스 적용 사례가 중요하고, 어떤 기업에는 정책 담당자와의 접점이 중요합니다. 기술을 알리는 것보다 실제 수요기관과 함께 성과를 보여주는 편이 중요한 기업도 있습니다. 같은 박람회라도 참여해야 할 이유는 회사마다 다릅니다.
따라서 새 업무의 단위는 더 이상 ‘박람회 브로셔 1개’가 아닙니다.
‘이 기업이 왜 이 박람회에 와야 하는지 설명하는 설득 패키지 1개’가 새로운 단위입니다.
파일 수만 늘어난 것이 아닙니다. 업무의 정의가 바뀌었습니다. 공통 정보를 한 번 정리하는 일에서, 대상별 맥락을 읽고 서로 다른 가치 제안을 만드는 일로 이동했습니다. 이것이 자동화와 AX를 가르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생산비가 낮아질수록 선택비가 커진다
AI로 브로셔를 100개 만들 수 있다고 해서 100개를 모두 만들어 보내는 것이 좋은 전략은 아닙니다. 이름과 로고만 바꾼 자료를 대량 발송하면, 개인화가 아니라 스팸이 됩니다. 생산능력은 커졌지만 상대가 읽어야 할 이유는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더 날카로운 선택입니다.
어떤 기업에 보낼 것인가. 왜 그 기업인가. 그 기업의 사업과 박람회의 공공적 목적은 어디에서 만나는가. 지금 접촉해야 하는가, 조금 더 기다려야 하는가. 전시 참여를 제안할 것인가, 정책대화를 제안할 것인가, 또는 이번에는 보내지 않는 편이 나은가.
예전에는 자료 제작 자체가 비쌌기 때문에 ‘무엇을 만들 것인가’보다 ‘일단 하나를 완성하는 것’이 병목이었습니다. 이제 제작비가 내려가면 병목은 앞으로 이동합니다. 무엇을 만들지, 누구에게 보낼지, 무엇을 만들지 않을지를 정하는 선택이 더 비싸집니다.
그래서 AI 시대의 기획은 아이디어를 내는 일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제한된 시간과 조직의 관심을 어디에 배분할지 결정하는 일입니다. AI가 후보 기업을 수백 곳 조사하고 우선순위를 제안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박람회의 목적, 공공적 가치, 접촉의 적절성, 정책적 경계까지 종합해 최종 대상을 정하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책임입니다.
AI가 생산의 희소성을 줄일수록 인간은 판단의 희소성을 관리해야 합니다. 인간의 일은 AI 앞에서는 기획으로, AI 뒤에서는 검수와 책임으로 이동합니다.
더 많이 만들수록 검수는 더 세밀해져야 한다
두 번째로 중요해지는 일은 검수입니다.
생성량이 100배 늘면 오류 가능성도 함께 표면화됩니다. 날짜 하나, 행사 규모 하나, 기업의 사업영역 하나가 틀려도 맞춤형 자료 전체의 신뢰가 무너질 수 있습니다. 공개된 사실과 내부 판단이 섞이거나, 참여 가능성을 확정된 것처럼 쓰거나, 기업의 이름만 바꾸고 문맥을 그대로 남기는 사고도 생길 수 있습니다.
특히 공공부문의 맞춤형 소통은 일반 마케팅보다 경계가 더 많습니다. 기업마다 관련성을 다르게 설명할 수는 있지만, 참여 기준이나 기회를 다르게 제공하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됩니다. 개인화는 규칙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동일한 규칙 안에서 상대와의 관련성을 더 정확히 설명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생산성이 높아지면 검수 부담이 자동으로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도 경계해야 합니다. 2024년부터 2026년까지 한 기업의 개발자 802명과 풀리퀘스트 19만여 건을 추적한 최근의 한 사전공개 연구는 AI 도입 뒤 개발자당 처리량이 기존의 2.09배까지 늘어나는 동안, 리뷰어 한 명이 감당하는 검토량도 약 두 배가 됐다고 보고했습니다. 한 기업의 관찰연구라 인과효과를 그대로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생성 속도가 검토 속도를 앞지를 때 어떤 병목이 생기는지는 잘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모든 문장을 사람이 처음부터 다시 읽는 방식으로 돌아가면 AI의 이점이 사라집니다. 검수 방식도 재설계해야 합니다.
날짜, 링크, 행사 규모, 금지 표현, 개인정보, 기업명 혼입은 규칙 기반 검사로 먼저 걸러낼 수 있습니다. 여러 모델이나 별도의 검증 에이전트가 사실관계와 누락을 교차검토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위에서 사람은 제안 논리가 실제로 타당한지, 표현이 과장되지 않았는지, 상대가 읽었을 때 왜 자신에게 온 자료인지 이해되는지, 공공기관이 책임질 수 있는 문장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AI가 초안을 만들고 사람이 오탈자만 보는 구조가 아닙니다. 기계는 반복 검사를 넓게 수행하고, 사람은 책임이 큰 판단을 깊게 수행하는 구조가 되어야 합니다.
남는 시간에는 ‘다른 일’을 해야 한다
자동화 담론은 흔히 절약된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남는다는 표현은 조금 수동적입니다. 어떤 작업이 100분의 1 시간에 끝났다고 해서 남은 100분의 99가 저절로 AX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시간을 어디에 다시 배분하느냐가 AX를 결정합니다. 실제 변화는 남은 시간을 쉬는 데 쓸 수 있다는 것보다, 전에는 할 수 없었던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정부혁신박람회 브로셔 사례에서 다른 일이란 이런 것입니다. 대상 기업의 사업과 공공서비스의 접점을 더 깊이 조사하는 일, 기업별 가설을 세우는 일, 어떤 문장과 제안에 반응하는지 측정하는 일, 반응이 없었던 이유를 다음 접촉에 반영하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 기업들의 수요를 읽고 박람회의 프로그램과 전시 구성을 고치는 일도 가능합니다.
브로셔 제작이 빨라졌기 때문에 남는 시간에 브로셔를 더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박람회 자체를 더 잘 기획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술 도입만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생산성 J-커브 연구는 AI 같은 범용기술의 효과를 얻으려면 새로운 프로세스, 제품, 비즈니스 모델, 인적 역량 같은 보완적 무형투자가 필요하다고 설명합니다. 새 도구를 기존 조직에 얹는 것만으로는 잠재력이 바로 생산성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기술을 전제로 업무를 다시 발명해야 합니다.
공공부문도 같은 방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NIA의 2026년 공공부문 AI 도입·활용 가이드는 첫 단계를 모델 구매가 아니라 행정 수요를 분석해 AI 서비스의 컨셉을 정의하는 일로 두고, 도입 뒤에도 성능 모니터링과 데이터 업데이트를 계속하도록 안내합니다. 무엇을 살 것인가보다 어떤 문제를 어떻게 다시 풀 것인가가 먼저라는 뜻입니다.
AX의 새로운 병목은 생성이 아니라 판단이다
자동화는 산출물의 공급능력을 늘립니다. AX는 늘어난 공급능력을 전제로 업무의 목적, 단위, 역할, 책임, 평가 기준을 다시 씁니다.
이 구분을 하지 않으면 조직은 AI로 예전 문서를 더 많이 만들고, 더 많은 메시지를 보내고, 더 많은 보고서를 쌓게 됩니다. 생산량은 늘지만 결정은 좋아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읽지 못한 자료, 검토하지 못한 초안, 선택하지 못한 대안이 쌓이면서 새로운 종류의 업무 부채가 생깁니다. 저는 이것을 기획부채와 검수부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앞으로 저는 자동화와 AX를 네 가지 질문으로 구분해 보려 합니다.
- 예전의 업무 단위가 그대로인가, 아니면 새로 정의됐는가.
- 비용 때문에 하지 못했던 일을 시작했는가.
- 사람의 시간이 단순 제작에서 기획과 검수로 이동했는가.
- 결과를 측정해 다음 선택과 업무 방식에 반영하는가.
속도와 생산량만 달라졌다면 자동화에 가깝습니다. 네 질문의 답까지 달라졌다면 업무 전환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사람의 가치는 ‘직접 만드는 능력’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만들 가치가 있는지 정하는 능력, 누구에게 어떤 이유로 보낼지 설계하는 능력, 잘못된 것을 버리는 능력, 최종 결과에 책임지는 능력으로 이동합니다.
정부혁신박람회에서 중요한 질문도 AI가 브로셔를 몇 개 만들었느냐가 아닙니다. 어떤 기업을 선택했는가, 그 기업이 참여해야 할 이유를 얼마나 정확히 찾았는가, 그 제안이 박람회의 공공적 목적과 맞는가, 발송 뒤 무엇을 배웠는가가 중요합니다.
같은 일을 100배 많이 하는 것은 거대한 자동화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능력 때문에 전에 하지 못했던 일을 시작하고, 사람과 기계의 역할을 다시 나누고, 기획과 검수의 기준을 높였다면 그때부터 AX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자동화는 과거의 일을 싸게 만듭니다.
AX는 그 뒤에 해야 할 다른 일을 발견하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