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EXAONE엑사원이 정부행정망에 들어왔습니다. 삼성 엑시노스를 떠올렸습니다.
중앙부처 공무원 책상에는 한동안 PC가 두 대씩 놓여 있습니다. 한 대는 업무용입니다. 행정망 또는 내부망이라고 부릅니다.한 대는 인터넷용입니다.
보안을 이유로 업무망과 바깥 인터넷망을 물리적으로 끊어놓은 것이죠. 2000년대 후반부터 부처마다 빠르게 퍼졌고, 효과는 분명했습니다. 해킹이든 자료 유출이든 사고가 눈에 띄게 줄었으니까요.
대신 행정망은 섬이 됐습니다. 인터넷과 완전히 끊긴 섬.
이 섬에는 바깥의 최신 AI가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GPT나 클로드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 데이터가 외부 서버로 나가야 하는데, 행정망은 애초에 그 데이터가 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만든 망이니까요. 데이터가 밖으로 나가야 작동하는 모델은 처음부터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깥에서는 매주 새 AI가 사람을 놀라게 하는 동안, 정작 우리가 안에서 만지는 진짜 자료, 법령과 지침과 보고서와 민원은 그 AI 근처에도 못 갔습니다. 내부망은 오래도록 AI 사막이었습니다.
그러다 지난 5월 29일, 그 섬에 다리가 하나 놓였습니다.
아직 몇몇 부처 대상 시범사업이긴 하지만 범정부 AI 공통기반이라는 인프라를 통해 구글 젬마4와 국산 엑사원 같은 최신 오픈 웨이트 모델을 내부망에서 바로 쓸 수 있게 됐습니다. 인터넷이 안 되는 그 PC에서 실제 업무 문장으로 물어봤더니, 답이 돌아왔습니다. 누군가에겐 사소한 기능 추가겠지만, 이 섬에서 일해 온 사람에게는 몇 년 묵은 갈증이 풀리기 시작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걸 보다가 엉뚱하게 엑시노스가 떠올랐습니다. 삼성은 퀄컴이라는 막강한 칩 강자를 옆에 두고도 자기 칩 엑시노스를 끝내 놓지 않습니다. 그걸 만드는 사업부가 수년째 적자라 얼마 전에는 성과급 논란까지 났는데도 그렇습니다. 퀄컴에 전부 맡기는 순간, 가격이든 물량이든 조건이든 퀄컴이 부르는 대로 끌려가기 때문입니다. 내 칩이 있어야 협상 테이블에서 할 말이 생깁니다. 손해를 보면서도 우리 것을 쥐고 있는 것은 비효율이 아니라 보험에 가깝습니다.
행정망에 우리 모델이 들어왔다는 소식도, 작아 보여도 결이 같습니다. 왜 굳이 우리 것을 가지려 하는가. 그 질문이 자꾸 밟혀서, 이 일을 “행정망에도 AI 들어왔다더라” 한 줄로 넘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 하필 Gemma4 젬마와 EXAONE 엑사원이었나
답은 앞에 이미 나와 있습니다. 망 안에 들일 수 있는 모델은, 가중치가 공개돼 있어 우리 인프라에 통째로 올려 돌릴 수 있는 오픈 웨이트뿐입니다. GPT도 클로드도 여기서는 후보가 못 됩니다. 젬마와 엑사원이 들어온 것은 인기투표 결과가 아니라, 망 안에 둘 수 있는 모델이 사실상 그것뿐이어서입니다.
그렇다고 그동안 망 안에 쓸 국산 모델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있긴 했습니다. 다만 막상 일을 시키면 한 박자씩 모자랐습니다. 돌아가긴 하는데 일이 되지는 않는, 딱 그 정도였습니다.
이번에는 들어온 모델의 체급이 달랐습니다. 구글 젬마4 31B급, 그리고 비슷한 덩치의 국산 엑사원. 멀티모달에 추론까지 되고, 코딩이나 추론 벤치마크에서 바깥 최신 모델과 엎치락뒤치락하는 수준입니다. 보고서 초안을 잡고, 긴 자료를 요약하고, 법령에서 근거를 끌어오는 일이 실제로 됩니다. 행정 실무가 굴러가는 선에 처음으로 닿은 것입니다. 망 안 모델이 드디어 데모를 졸업하고 실무로 넘어왔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우리 소버린 AI인가
흔히 소버린 AI라고 부르는 대목입니다. 우리 공공 데이터를 우리가 쥔 모델로 다룬다는 이야기고, 엑사원이 들어온 것은 그 상징이 맞습니다.
그런데 주권이 한 겹은 아닙니다. 첫 겹은 데이터입니다. 가중치를 우리 망 안에 두고, 데이터가 한 발짝도 밖으로 못 나가게 묶어두는 것. 이 층위에서는 미국 구글이 만든 젬마조차, 망 안에만 있으면 주권적으로 쓰입니다. 어차피 데이터를 남에게 넘기지 않으니까요.
더 깊은 겹은 모델 자체입니다. 남의 모델에 통째로 매이지 않는 것. 앞서 꺼낸 엑시노스가 여기서 이어집니다. 삼성이 적자를 감수하며 엑시노스를 놓지 않는 것은 퀄컴 칩을 못 빌려서가 아니라, 통제권을 통째로 넘기기 싫어서입니다. 엑사원도 정확히 같은 자리에 서 있습니다. 젬마가 멀쩡히 있는데도 우리 모델을 굳이 갖는 이유는, 우리 AI의 통제권만큼은 우리가 쥐고 있겠다는 것이니까요. 엑시노스든 엑사원이든, 결국 같은 주권 이야기입니다.
이게 우리만의 고민도 아닙니다. 미국은 진작부터 자기 모델을 자기 정부 안에서 굴려왔고,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힘 있는 나라는 늘 자기 AI로 자기 나라를 돌려왔던 것이죠. 우리가 처음으로, 우리 손으로 만든 모델을 우리 정부 안에 들였습니다. 여러 모델 중 한 자리에 불과하지만, 자기 모델을 돌리는 나라는 보기 드문 일입니다.
덧붙이면, 엑사원은 정부가 추진 중인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사업에서 나온 여러 국산 모델 중 하나입니다. 이 사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앞으로 엑사원 말고도 다른 국산 모델들이 차례로 행정망에 들어올 것으로 봅니다. 지금은 그중 하나가 먼저 자리를 잡은 단계입니다.
평소 바깥에서 쓰던 Claude Opus 4.8만은 못했습니다. 그래도 인터넷이 안 되는 행정내부망에서 사용한다는 사실이, 20년 가까이 섬이던 이 망의 내력과 겹치니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지금은 업무 전반에 깔린 것도 아니고, 우선 한번 써보라고 문을 열어둔 단계입니다. 임계점은 넘었다는 신호이면서, 아직 문턱에 서 있다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기술 문제는 시간이 풀어줄 것입니다. 정작 더 어려운 것은, 백만명이 넘는 공무원들에게 같이 쓰자고 설득하고 합의하는 일입니다. 그건 끝까지 사람의 몫일 것입니다.
저는 전산부서는 아닙니다만 요즘처럼 공무원 일하는게 즐거운 적이 없었습니다. AI기술발달이 행정 내부를 혁신하고, 나아가 국민 모두에게 더 나은 공공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