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신문고는 국산 AI 활용의 마중물이 될 수 있다

소버린 AI는 거대한 구호보다 작은 실전에서 살아난다

국산 AI가 챗GPT나 클로드 같은 글로벌 최상위 모델보다 성능이 부족하다는 말은 대체로 맞다. 이 사실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범용 추론, 코딩, 긴 글쓰기, 복잡한 문제 해결 같은 영역에서는 글로벌 빅테크 모델이 앞서 있다. 국산 AI를 키우자는 말이 곧바로 국산 모델이 이미 세계 최고라는 뜻은 아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멈출 필요도 없다. 성능이 부족하니 못 쓴다고 결론 내리면, 국산 AI는 영원히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없다. 반대로 아직 준비가 덜 된 모델을 모든 업무에 무리하게 투입하면 실패 사례만 남는다. 필요한 것은 포기도 아니고 과장도 아니다. 쓸 수 있는 작은 자리부터 찾아 실제 사용 사례를 쌓아가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행정안전부의 ‘AI 안전신문고’는 국산 AI 활용의 좋은 마중물이 될 수 있다. LG AI연구원과 한국전자기술연구원이 엑사원 4.5를 기반으로 AI 안전신문고 1단계 연구개발을 마치고, 연내 시범 서비스를 준비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안전신문고에는 하루 3만9000건이 넘는 신고가 들어온다. 현재도 일부 키워드 자동분류가 적용되어 있지만, 신고 내용에 오타가 있거나 표현이 불명확하거나 사진과 영상이 포함되어 있으면 정확도가 떨어진다고 한다. 결국 실무자가 첨부파일을 직접 열어보고, 내용을 판단하고, 소관 기관으로 넘기는 과정이 필요했다.

엑사원 4.5는 바로 이 지점에 들어간다. 사진과 영상을 포함한 신고 내용을 읽고, 신고 유형을 분류하고, 필요하면 신고 내용을 자동으로 생성하며, 중요도가 높은 신고는 중간 분류 부서를 거치지 않고 조치 부서로 바로 이송하는 역할을 맡는다. 예를 들어 시민이 막힌 빗물받이 사진을 올리면, AI가 사진을 분석해 “장마철 막힌 빗물받이 신고”처럼 유형을 파악하고 조치 부서로 빠르게 넘기는 식이다.

이 사례가 흥미로운 이유는 국산 AI에게 처음부터 너무 큰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데 있다. AI 안전신문고는 국민의 권리관계를 최종 판단하거나 복잡한 법적 결론을 자동으로 내리는 시스템이 아니다. 먼저 신고를 읽고, 선별하고, 분류하고, 이관하는 업무에 AI를 쓰겠다는 것이다. 공공부문에서 AI가 들어가기 좋은 첫 자리는 바로 이런 곳이다. 화려한 대화 능력보다 대량의 입력을 안정적으로 처리하는 능력이 중요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범용 추론보다 국내 행정 맥락과 한국어 생활 표현을 읽는 능력이 더 직접적으로 필요한 곳이다.

안전신문고 업무를 생각해보면 더 분명해진다. 국민은 행정 용어로 신고하지 않는다. “도로가 꺼졌다”, “가로등이 안 켜진다”, “빗물받이가 막혔다”, “불법 주정차 때문에 위험하다”, “시설물이 무너질 것 같다”처럼 생활 언어로 말한다. 문장이 짧을 수도 있고, 오타가 있을 수도 있고, 설명보다 사진 한 장이 더 중요한 경우도 많다. 행정은 이것을 도로, 교통, 시설물, 환경, 재난안전, 지자체 사무 같은 처리 단위로 바꿔야 한다. 이 변환 과정이 늦어지면 실제 조치도 늦어진다.

국산 AI가 맡을 수 있는 일은 바로 이 변환의 앞단이다. 접수된 신고를 읽고, 유형을 나누고, 긴급성을 가늠하고, 담당기관 후보를 붙이고, 사람이 확인할 수 있는 근거와 함께 넘기는 일이다. 최종 책임은 여전히 행정기관과 담당자가 지지만, AI는 초벌 정리와 라우팅을 도울 수 있다. 이것은 AI가 공무원을 대체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AI가 공무원이 더 빨리 판단할 수 있도록 업무 흐름을 정돈해주는 것이다.

소버린 AI의 활용 전략도 여기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 소버린 AI를 국가 자존심의 문제로만 말하면 논의가 쉽게 허공으로 뜬다. “우리도 초거대 AI가 있어야 한다”, “미국 모델에 종속되면 안 된다”는 말만으로는 실제 현장을 움직이기 어렵다. 반대로 “국산 모델은 성능이 떨어지니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도 현실을 너무 좁게 보는 것이다. 공공부문에는 최고 성능의 범용 모델이 아니어도 충분히 가치를 낼 수 있는 반복 업무가 많다. 특히 국내 법령, 국내 기관 체계, 한국어 생활 표현, 공공망 보안 요건, 행정 책임 구조와 결합된 업무에서는 국산 AI가 맡을 수 있는 영역이 생긴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쓰느냐”다. 국산 AI에게 처음부터 모든 국민 상담을 맡기거나, 복잡한 행정 판단을 자동화하라고 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역시 성능이 부족하다”는 결론만 남는다. 하지만 안전신문고처럼 대량 신고를 선별하고 분류하고 이관하는 업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곳에서는 AI가 세계 최고 수준의 철학적 추론을 할 필요가 없다. 대신 한국어 신고 문장을 잘 읽고, 사진과 영상의 위험 요소를 식별하고, 행정 분류체계에 맞게 나누고, 사람이 확인할 수 있는 근거와 함께 넘기면 된다.

국산 AI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완벽한 승리가 아니라 반복 가능한 사용 사례다. 안전신문고에서 신고 분류를 해보고, 국민신문고에서 민원 유형 분류를 해보고, 콜센터 기록을 정리해보고, 내부 문서를 라우팅해보는 식으로 작은 성공을 쌓아야 한다. 실제 업무 안에서 써봐야 어떤 표현에 약한지, 어떤 유형을 잘못 분류하는지, 어떤 데이터가 더 필요한지 알 수 있다. 모델은 실험실 안에서만 커지는 것이 아니라, 업무 흐름 안에서 부딪히며 좋아진다. 소버린 AI도 마찬가지다.

정부 입장에서도 이 접근은 현실적이다. “국산 AI를 개발해서 어디에 쓸 것인가”라는 질문에 “성능이 부족해서 못 씁니다”라고만 답할 수는 없다. 그러면 소버린 AI 정책은 힘을 잃는다. 그렇다고 무리하게 전면 도입해서 실패를 자초할 수도 없다. 그러니 답은 “쓸 수 있는 부분부터 쓰겠습니다”가 되어야 한다. 안전신문고의 접수, 선별, 분류, 이관 같은 업무는 그 답에 가깝다. 성능 격차를 인정하면서도, 국산 AI가 공공업무 안에서 실용성을 증명할 수 있는 좁고 명확한 자리를 찾는 것이다.

이 점에서 행정안전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소버린 AI는 과학기술 정책만으로 성공하지 않는다. 모델을 만드는 연구기관과 기업만 있어서는 부족하다. 실제 업무를 가진 부처가 써줘야 한다. 공공부문 안에서 “여기라면 쓸 수 있다”는 자리를 열어줘야 한다. 안전신문고는 그런 의미에서 좋은 테스트베드가 될 수 있다. 국산 AI가 단순한 발표용 데모가 아니라 실제 행정 처리 흐름 안에서 작동하는지 검증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조심해야 할 점도 있다. AI가 신고를 잘못 분류하면 처리가 늦어질 수 있다. 긴급한 위험이 낮은 우선순위로 밀릴 수도 있다. 사진이나 영상 판단이 틀릴 수도 있고, 특정 유형의 신고가 반복적으로 과소분류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시스템은 처음부터 완전 자동처리로 가면 안 된다. AI가 분류하고, 사람은 예외와 고위험 사안을 검토하며, 오분류 데이터를 다시 학습에 반영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소버린 AI의 성공은 모델을 도입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행정 현장에서 오류를 관리하고 개선하는 운영체계를 만들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안전신문고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하다. 국산 AI의 생존 전략은 세계 최고 모델과 정면승부하는 것만이 아니다. 국내 행정에서 반복적이고, 보안에 민감하며, 한국어와 행정 맥락에 깊이 묶인 업무를 하나씩 맡아가는 것도 전략이다. 안전신문고, 국민신문고, 콜센터 기록 분류, 민원 유형 라우팅, 보도자료 초안 정리, 법령·지침 검색 보조, 내부 문서 분류 같은 영역이 먼저일 수 있다. 여기서 성공 사례가 쌓이면 국산 AI는 추상적인 국가전략이 아니라 실제 행정 인프라가 된다.

소버린 AI는 거대한 구호만으로 살아남지 못한다. “우리 모델도 있습니다”만으로는 부족하다. 반대로 “글로벌 모델보다 못하니 필요 없습니다”도 답이 아니다. 진짜 질문은 어느 업무에서, 어떤 위험 수준으로, 어떤 사람의 검토 아래, 어떤 성과를 낼 수 있느냐다. 안전신문고에 엑사원을 넣는 시도는 이 질문에 대한 현실적인 첫 답이다.

국산 AI는 당장 모든 것을 잘할 필요는 없다. 성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포기할 필요도 없다. 먼저 잘할 수 있는 작은 업무를 찾아야 한다. 국민의 신고를 읽고, 위험을 가려내고, 담당기관으로 빠르게 흘려보내는 일. 그것이 화려한 챗봇보다 덜 멋져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작은 사용 사례가 쌓여야 국산 AI도 행정 안에서 자리를 얻는다. 소버린 AI가 살아남는 길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실제 업무의 병목 하나를 줄이는 경험을 차곡차곡 모으는 데서 시작된다.